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문단 편집) ====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란트베어 ==== [[독일어]]: Kaiserlich-königliche Landwehr(k.k. Landwehr) [[파일:9200291_bildarchivaustria_at_Preview_11270089.jpeg.jpg|width=500]]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상급대장의 10군 소속 란트베어 제6연대 장병들의 모습. 티롤 전선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향토방위군. 란트베어란 단어 자체가 지역방위군을 의미한다. 명칭의 황립(Kaiserlich)은 당연히 [[오스트리아 제국]]을, 왕립(Königlich)은 헝가리가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을 뜻한다. 줄일 때에는 합동 육군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k.u.k.가 아닌 k.k. 란트베어로 표기한다. 빈에 있는 황립 및 왕립 국방성의 소관으로, 평시에는 합동군을 관할하는 전쟁성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자체적인 사관학교로는 빈의 k.k. 프란츠 요제프 군사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1808년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주도로 이루어진 군 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이유는 소진된 오스트리아 정규군의 전력을 싸고 빠르면서도 확실하게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란트베어 부대원들은 고향 땅을 지킨다는 애향심으로 모집되어 2선급 무기, 자비 구매한 군복으로 무장한 채 예비역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민병대가 아니었고, 혁명적인 국민의 군대였던 [[프랑스군]]을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야심찬 목적을 가진 오스트리아의 차기 군대이자 [[예비군|동원예비군]]으로 설계되었다. 징집 연령은 18세에서 55세 미만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부족한 훈련으로 인해 야전을 버티지 못하고 자체 붕괴하는 바람에 보통은 예비 또는 치안군 전력으로 사용되었다. 의욕이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못지 않게 넘쳤지만 주말마다 연병장에 집합해 몇 시간 훈련받은 게 다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졸전을 보다 못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들을 두 개로 다시 나누어, 정규군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평가받는 1급 란트베어와 그에 못 미치는 2급 란트베어를 구분하였다. 후자는 지역 치안이나 포로수용소 경비 임무를 수행하였고, 후술할 란트슈투룸 예비군이 되어 갈라져나간다. 한편 란트베어는 헝가리 의회의 반대로 헝가리에서는 모집되지 않았고, 갈리치아에서는 반오스트리아 성향이었던 폴란드인들을 못 믿겠다는 이유로 모집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실상 [[보헤미아]]만이 유일한 란트베어 공급처였다. 1859년 잠시 해산되었다가, 대타협 이후인 1869년 재창설되었다. 독립된 자신들만의 군대를 원했던 헝가리가 지역방위군인 혼베드를 창설하자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자신들의 향토방위군인 란트베어를 부활시킨 것. 다만 1869년부터 전부 소집된 것은 아니다. 티롤의 란데스슈첸들을 제외한 일반 란트베어 보병연대들이 설립된 것은 1889년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국가방위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법안 제정 직후 빈에 주둔한 제1보병연대부터 크라쿠프에 주둔한 제16보병연대까지 총 16개 연대가 설립되었다. 기병의 경우에는 보병보다 설립이 빨라 1883년부터 울란 연대들이 설립되었다. 가장 늦은 것은 포병연대들이었는데 1909년이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1917년 이후로는 란트베어(Landwehr 향토방위군)란 명칭이 사라지며, 대신 슈첸(Schützen 총병)으로 바뀐다. 1914년 기준으로 7개 보병사단에 속한 37개 보병연대, 3개 산악연대와 2개 란데스슈첸 기병대대, 6개 울란 창기병 연대, 8개 야전직사포병대대와 8개 야전곡사포병대대로 구성되었다. 징집된 병사가 란트베어에 갈 지는 선착순이나 뽑기로 결정되었으며, 의무복무기간은 보병 2년, 기병과 포병은 3년이었다. 전역 이후에는 10년간 예비역 란트베어 대원으로 편성되며 총 20주의 예비역 훈련을 받았고, 그 후에야 란트슈투름으로 빠질 수 있었다. 편제는 합동 육군과 달리 삼각편제였으며, 2선급이었기에 인적 자원도 좋지 않았다. 지원복무자들은 1년간 복무하면 전역했을 정도다.[* 다만 이들은 개인 장구를 직접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나 장비의 질은 합동 육군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이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자신들의 군대인 란트베어에 예산을 몰아주려 노력한 결과였다. 헝가리 또한 마찬가지로 혼베드에 집중하는 바람에 합동 육군의 현대화는 항상 지지부진했다. * '''보병''' * '''보병연대''' K.k. Landwehr Infanterieregimenter. 일반적인 보병연대들. 1914년 시점에 총 37개 연대가 존재했다. 사단으로 치면 총 7개 사단 규모이다. * '''란데스슈첸 보병대''' K.k. Landesschützen. 1871년 설립된 티롤 후백국과 포어아를베르크의 보병대. 10개 대대, 다 합해 3개 연대 규모였다. 1917년 이후로는 카이저슈첸(Kaiserschützen)으로 명칭이 바뀐다. * '''황립 오스트리아 및 왕립 보헤미아 산악부대''' K.k Gebirgstruppe. 오스트리아 란트베어 산하에 [[티롤]] 지역 방위를 위해 편제된 특수 부대. 1906년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주도로 상술한 란데스슈첸 산악보병대대들과 란트베어 보병연대[* 제4, 27연대], 하술할 란데스슈첸 티롤 기병대대들을 통합하여 만든 산악전 전문 부대이다. 주적인 [[이탈리아 왕국군]] 산악전 부대인 알피니 연대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산악전 부대이니만큼 주로 경량화된 카빈 소총이나 산포 등으로 무장했다. 깎아지른 알프스 산맥과 빙하 지대가 작전 구역이었으니만큼 [[스키]]나 [[고글]], 설피나 레펠 등의 극지, 산지용 장비도 군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뜻한 여름에는 알프스의 산장과 각종 베이스캠프들을 기지 삼아 능선을 오르내리며 훈련했고, 겨울에는 계곡으로 내려와 스키를 통한 기동 훈련에 매진했다. * '''기병''' * '''란데스슈첸 기병대''' Reitende Landesschützen. 달마티아와 티롤에 기반한 2개 기병대대. 검기병 부대이며, 세이버와 리볼버로 무장했다. 이들 역시 1917년 이후에는 카이저슈첸 기병대로 명칭이 변경된다. 두 대대 중 티롤 대대는 하술할 란트베어 울란 1연대와 함께 란트베어 기병여단을 구성했다. 전시에 티롤 대대의 1중대와 3중대는 란트베어 보병사단에, 2중대는 헝가리 방위군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 '''황립 및 왕립 란트베어 [[울란]] 연대''' k.k. Landwehr Ulanen Regimenter. 1869년 용기병 및 울란 창기병 중대들로 형성되어 1883년에 6개 연대들로 재조직되었다. 2개씩 묶여 3개 기병여단을 구성했으나, 보병사단들에 배속되어 작전을 뛰기도 했다. * '''포병''' * '''야전곡사포병''' k.k. Landwehr Feldhaubitzdivision. 1909년에 설치되었다. 총 8개 대대 규모이다. 오헝 제국군 기병, 포병 및 철도 병과의 Division은 사단이 아니라 대대를 의미한다. * '''야전직사포병''' k.k. Landwehr Feldkanonendivision 1913년에 설치되었다. 역시 총 8개 대대 규모이다. * '''기타''' * '''황립 및 왕립 헌병군''' K.k. Gendarmerie. 국가 헌병대로, 1848년 혁명 당시 이탈리아 혁명가들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범죄자 체포와 반란 진압 임무를 띄었다. 대타협 이후에는 란트베어 산하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헝가리 왕국령의 관할권을 신생 헝가리 혼베드 헌병군에 넘겨주었다. 제국군 해산 이후에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헌병군으로 살아남았으나 최종적으로 2005년에 [[오스트리아 연방경찰청]]에 통합되어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